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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 미스터리

10. 블랙홀 미스터리 , 웜홀과 양자 얽힘은 같은 것인가

웜홀과 양자 얽힘은 같은 것인가 — ER=EPR 가설

우주 반대편에 있는 두 입자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쪽을 측정하는 순간,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다른 쪽의 상태가 즉각적으로 결정된다. 이것을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이라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이 현상을 두고 "유령 같은 원거리 작용"이라며 못마땅해했다. 어떤 정보도 빛보다 빠르게 전달될 수 없다는 상대성 이론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3년, 물리학자 후안 말다세나(Juan Maldacena)와 레너드 서스킨드(Leonard Susskind)가 하나의 논문을 발표했다. 제목은 단순했다. ER=EPR. 여기서 ER은 아인슈타인-로젠 다리, 즉 웜홀을 뜻하고, EPR은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 역설, 즉 양자 얽힘을 다룬 1935년 논문을 가리킨다. 두 사람의 주장은 이것이었다. 양자 얽힘과 웜홀은 서로 다른 현상이 아니다. 같은 것이다.

 

웜홀과 양자 얽힘은 같은 것인가

1. 두 개의 얽힌 블랙홀

말다세나와 서스킨드의 논문은 구체적인 시나리오에서 출발했다. 두 개의 블랙홀이 완전히 양자적으로 얽혀 있다고 가정하자. 이 두 블랙홀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물리적으로는 아무런 연결이 없다. 그런데 이 두 블랙홀의 내부를 수학적으로 분석하면, 그 내부가 웜홀로 연결된 구조와 동일한 기하학을 보인다는 것이다.

말다세나는 2001년에 영원한 블랙홀(eternal black hole)이라는 개념을 다룬 적이 있다. 서로 얽힌 두 블랙홀의 내부는 아인슈타인-로젠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와 수학적으로 동치라는 내용이었다. 서스킨드와의 2013년 논문은 이것을 일반화했다. 얽힌 입자 쌍 전체가, 그 얽힘의 정도에 따라 크기와 형태가 다른 웜홀에 대응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양자 얽힘은 단순한 정보의 상관관계가 아니다. 두 입자 사이에는 실제로 시공간의 연결 구조가 존재한다. 우리가 실험실에서 두 입자를 얽히게 만들 때마다, 미시적인 웜홀이 그 사이에 생겨나는 것일 수 있다. 보이지 않을 만큼 작지만,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구조로서.

 

ER=EPR, 웜홀, 양자 얽힘

2. 가설이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ER=EPR 가설을 처음 접하면 즉각적인 오해가 생긴다. 두 얽힌 입자가 웜홀로 연결되어 있다면, 그 웜홀을 통해 신호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양자 얽힘을 이용한 초광속 통신이 가능해지는 것 아닌가.

말다세나와 서스킨드는 이 오해를 명확히 정리했다. ER=EPR이 허용하는 웜홀은 통과 불가능한(non-traversable) 웜홀이다. 이 웜홀은 두 지점을 연결하지만, 어떤 물질이나 신호도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통과시킬 수 없다. 이것은 양자 얽힘의 성질과 정확히 대응된다. 양자 얽힘 역시 두 입자를 연결하지만, 그 연결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쪽 측정 결과가 다른 쪽에 즉각 반영되더라도, 그것으로 의미 있는 신호를 보낼 수 없다. 두 현상의 제약 조건이 동일하다.

이 가설이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앞서 다룬 블랙홀 정보 역설과의 연결 때문이다. 006편에서 다룬 파이어월 역설은 블랙홀 내부의 낙하자와 외부의 호킹 복사 입자 사이의 얽힘을 끊어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ER=EPR은 그 얽힘이 실제로는 웜홀이라면, 파이어월 없이도 정보가 보존될 수 있다는 방향의 해결 가능성을 열어준다. 얽힘이 곧 시공간 연결이라면, 정보는 웜홀을 통해 어떤 형태로든 보존될 수 있다.

 

웜홀과 양자 얽힘은 같은 것인가, ER=EPR

3. 공간은 얽힘으로 만들어지는가

ER=EPR 가설이 맞다면, 그 함의는 생각보다 훨씬 깊다. 이 가설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면 하나의 급진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공간 자체가 얽힘으로 만들어진다.

우주의 두 지점이 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즉 공간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 사실은 그 지점들 사이의 양자 얽힘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얽힘이 강하면 두 지점은 가깝게 연결되고, 얽힘이 약하거나 없으면 공간적으로 멀어진다. 이 관점에서 공간의 기하학은 양자 얽힘의 패턴이 만들어내는 창발적 구조다.

이것은 단순한 철학적 추측이 아니다. AdS/CFT 대응(anti-de Sitter/conformal field theory correspondence)이라 불리는 이론 물리학의 강력한 도구 위에서 이 아이디어는 수학적으로 탐구되고 있다. 말다세나가 1997년 발견한 이 대응 원리는, 중력이 작용하는 시공간의 물리학과 그 경계면에서의 양자 장론이 동치라는 것을 보여준다. ER=EPR은 이 틀 안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결론 중 하나다.

아직 증명된 이론은 아니다. 그러나 이 방향이 맞다면, 공간과 중력은 양자 정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일반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의 통합은 이 연결 고리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웜홀과 양자 얽힘은 같은 것인가

마무리

웜홀과 양자 얽힘은 같은 것인가. ER=EPR은 그렇다고 말한다. 아직 증명된 이론이 아니고, 검증 방법도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가설은 물리학의 두 기둥인 일반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 얼마나 깊은 곳에서 연결되어 있는지를 암시한다.

공간이 얽힘으로 만들어진다면, 웜홀이 통신 수단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얽힘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없는 이유와 정확히 같다면, 우주의 두 언어는 사실 하나의 언어로 쓰여 있는 것이다. 그 언어를 완전히 해독하는 날, 우리는 공간이 무엇인지, 정보가 무엇인지, 그리고 중력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처음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