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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 미스터리

16. 블랙홀 미스터리 , 사건의 지평선은 당신을 태운다 — 방화벽 역설

사건의 지평선은 당신을 태운다 — 방화벽 역설

블랙홀에 떨어지는 사람은 사건의 지평선을 통과하는 순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이것이 일반 상대성 이론이 오랫동안 말해온 내용이다. 지평선은 특별한 물리적 경계가 아니라 단지 좌표상의 경계이며, 낙하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그 순간은 아무 사건도 없이 지나간다. 충분히 큰 블랙홀이라면 강한 조석력도 없다.

그런데 2012년 물리학자 네 명이 이 전제를 정면으로 뒤흔드는 논문을 발표했다. 알메헤이리(Ahmed Almheiri), 마롤프(Donald Marolf), 폴친스키(Joseph Polchinski), 선리(James Sully). 이 네 사람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AMPS라 불리는 이 논문의 주장은 간결하고 충격적이었다. 사건의 지평선에는 방화벽(firewall)이 있을 수 있다. 블랙홀에 떨어지는 사람은 고에너지 복사에 의해 즉시 소각된다.

방화벽 역설은 블랙홀 정보 역설을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나왔다. 그런데 그 해결책이 오히려 더 근본적인 모순을 만들어냈다.

 

사건의 지평선은 당신을 태운다, 방화벽 역설

1. 세 가지 원칙이 동시에 참일 수 없다

AMPS 논문의 핵심은 세 가지 물리학 원칙이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첫 번째 원칙은 단일성(unitarity)이다. 단일성이란 양자역학의 근본 원리 중 하나로, 정보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물리 과정은 원칙적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블랙홀이 호킹 복사를 통해 증발하면서 방출하는 복사 입자들은 블랙홀에 떨어진 물질의 정보를 담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단일성이 요구하는 것이다.

두 번째 원칙은 등가 원리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의 핵심으로, 자유 낙하하는 관측자는 중력의 영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건의 지평선을 통과하는 낙하자는 그 순간 국소적으로 아무 이상한 현상도 경험하지 않아야 한다.

세 번째 원칙은 양자 얽힘의 일부성(monogamy of entanglement)이다. 양자 얽힘은 배타적이다. 하나의 입자가 두 번째 입자와 최대로 얽혀 있다면, 그 입자는 세 번째 입자와 동시에 최대로 얽힐 수 없다.

AMPS는 이 세 원칙이 동시에 성립할 수 없는 상황을 구성했다. 단일성이 성립하려면 호킹 복사 입자들은 블랙홀 외부의 이전 복사 입자들과 얽혀 있어야 한다. 동시에 등가 원리가 성립하려면 그 복사 입자는 사건의 지평선 내부의 입자와도 얽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얽힘의 일부성에 의해 하나의 입자가 두 방향 모두와 동시에 최대로 얽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 원칙 중 하나는 반드시 틀려야 한다.

 

방화벽 역설, AMPS

2. 방화벽이 생기는 이유

단일성을 포기하는 것은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양자역학의 기반을 흔드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얽힘의 일부성은 양자역학의 수학적 결과이므로 바꾸기 어렵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등가 원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등가 원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사건의 지평선이 물리적으로 특별한 장소라는 의미다. 지평선을 통과하는 낙하자가 실제로 뭔가를 느껴야 한다. AMPS가 제안한 것이 방화벽이다.

방화벽이 생기는 논리는 이렇다. 호킹 복사가 정보를 담기 위해서는 블랙홀 바깥에서 방출된 복사 입자가 이전에 방출된 입자들과 강하게 얽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얽힘이 성립하려면 사건의 지평선 바로 안쪽에 있는 입자와의 기존 얽힘이 끊어져야 한다. 양자역학에서 얽힘이 강제로 끊어질 때 해당 지점에서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방출된다. 이 에너지가 사건의 지평선을 고에너지 복사로 가득 찬 불타는 장벽으로 만든다. 방화벽이다.

방화벽이 존재하면 블랙홀에 가까이 다가오는 어떤 물체도 지평선에 도달하기 전에 또는 도달하는 순간 소각된다. 50년 이상 물리학 교과서에 실려온 "지평선을 통과하는 낙하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서술이 틀릴 수 있다.

이것이 물리학 공동체에 충격을 준 이유다. 방화벽을 받아들이면 등가 원리라는 현대 물리학의 가장 견고한 기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방화벽을 거부하면 단일성을 포기하거나 블랙홀 보완성의 새로운 버전을 찾아야 한다.

 

사건의 지평선은 당신을 태운다, 방화벽 역설

3. 제안된 탈출구들과 그 한계

방화벽 역설이 발표된 이후 수많은 탈출구가 제안됐다. 어느 것도 물리학 공동체의 합의를 얻지 못했다.

블랙홀 보완성(black hole complementarity)은 방화벽 역설 이전에 서스킨드(Leonard Susskind)와 린드(Gerard 't Hooft) 등이 제안한 개념으로, 블랙홀 밖의 관측자와 안으로 떨어지는 관측자는 서로 다른 물리적 실재를 경험하며 두 관점이 동시에 비교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AMPS는 이 논리가 방화벽 상황에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였다.

ER=EPR 가설은 이 시리즈 010편에서 다룬 것으로, 말다세나(Juan Maldacena)와 서스킨드가 2013년 제안한 개념이다. 양자 얽힘과 웜홀이 같은 현상의 두 가지 표현이라면, 얽힘의 끊어짐 없이 정보가 전달될 수 있는 구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방화벽 없이 단일성을 유지하는 경로다. 그러나 이 가설도 아직 수학적으로 완전하게 확립되지 않았다.

퍼즈볼 가설은 끈이론 관점에서 블랙홀 자체의 구조를 재정의해 방화벽 문제를 원천적으로 피하려 한다. 블랙홀에 사건의 지평선이 없다면 방화벽도 없다. 이 역시 다음 글에서 다룰 내용이다.

결론적으로 방화벽 역설은 현재 미해결 상태다. 단일성, 등가 원리, 얽힘의 일부성 중 무엇을 포기하거나 수정해야 하는지, 아니면 세 가지 모두 유지하면서도 모순을 피할 수 있는 새로운 물리학이 가능한지 아직 답이 없다.

 

방화벽 역설, 사건의 지평선은 당신을 태운다

마무리

사건의 지평선은 당신을 태우는가. 현재 물리학은 명확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방화벽이 존재할 수도 있고, 방화벽 없이도 모든 원칙이 유지되는 새로운 이론이 가능할 수도 있다.

이 역설이 흥미로운 이유는 블랙홀 정보 역설을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탄생했다는 점이다. 006편에서 다룬 것처럼 블랙홀 정보 역설은 50년 이상 물리학자들이 씨름해온 문제다. AMPS는 그 역설에 하나의 해법을 제안하려다 더 깊은 층위의 역설을 발굴했다. 해결책이 문제를 낳고, 그 문제가 다시 해결책을 요구하는 구조다.

블랙홀은 물리학의 가장 단단한 기반들을 반복적으로 시험하고 있다. 일반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 동시에 적용되어야 하는 블랙홀의 경계에서, 두 이론 중 어느 하나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 수정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지는 아직 블랙홀만이 알고 있다.

끈이론은 이 문제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블랙홀의 구조 자체를 다시 쓰면 방화벽이 처음부터 필요 없어질 수 있다는 발상이다.